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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율을 높이려면 "애기 추워요"를 금지해야한다즐겁고 행복한 미국 생활/일기 + 여행 2024. 1. 10. 05:56
서울 엄마집에서 1.5살 알란이와 0.1살 에블린을 키우면서, 밖에 나갈 때마다 적어도 한번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듣는 말이었다.
"애기 추워요"
처음엔 "애기가 더위를 많이 타서 안 추워요" 라던가 "괜찮아요~" 등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한 여름 무더위에 찌든 날에도, 유난히 추운 가을날에도, 알란이/에블린이 어떤 옷을 입고 있던간에 - 밖에 나갈 때마다 언제나 들었다. 비슷하게는 "아기 양말 왜 안신켰어요", "아기 병원 갔어요", "아기 왜 무릎보호대 안했어요" 등등이 있다.
보통은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지만, 어떨 땐 실제로 나/나의 엄마에게 화를 내며 소리치는 경우도 있었다.
엄마가 한 여름 비가 오는 날 알란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물웅덩이에서 놀고 있으니까, 지나가는 할머니가 엄마에게 호통을 쳤다고 했다.
한번은 알란이가 사래가 들었는지, 기침을 연달아 10~20번 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웬 할아버지가 나에게 "애 병원 갔어? 병원 갔냐고? 병원을 가야지 안가면 어떡해"하며 (무려 반말로) 나에게 화를 냈다. (본인 아이 키우는데 1/10이라도 참여하셨는지 참 궁금하다)
엄청 웃긴 또 비슷한 경험은 - 롯데건설 앞에서 1인 시위 하던 사람이 서있던 자리에서 벗어나와 나에게 뭐라고 한 일. 내가 보슬비가 내릴 때 알란이 유모차에 태우고 상가에 가고 있었는데, 그거 가지고 왜 비 오는데 애기 보호 안하냐고 뭐라고 한 거였다 (우리 집에서 상가까지 1분이다...).
수개월간 비슷한 패턴의 소리를 계속 듣다보니 이건 단순히 아기가 춥다고 걱정하는 것이 아닌걸 알게되었다.
100% 진심어린 걱정이 아니라 (나름 걱정인 부분도 있지만), 오지랖 부리고 훈수를 두려는 시도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다음과 같다:
1.
일단, 아이의 모습을 3초도 보지 않은 지나가는 행인이 내 아이가 현재 추운지 더운지 절대 알 수 없다. 아이의 신체적 특징 (열이 많은 아인지, 추위를 많이 타는 아이인지)과 현재의 상황 (여태까지 빽빽 울어서 머리통에서 김이 나오는 중이라 식히러 나왔는지, 내내 따뜻한 실내에 있다가 1분전에 밖에 나온건지)를 24시간 끼고 살며 돌봐주는 엄마가 잘 알겠나, 아니면 지나가는 행인이 잘 알겠나.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훈수를 두려는 어이없는 시도이다.
또는 아무리 실제로 아이를 춥게 놔두는 상황이어도 - 그게 아이의 부모님이 아이를 강하게 키우려는 노력인지 지나가는 행인은 알길이 없다. 아니면 더 봐줘서, 실제로 무지/무관심으로 아이를 춥게 놔둬도, 그 결과 (아이가 아픔)을 책임질 사람은 결국 아이의 부모이다. 지나가는 행인은 갈 길 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러니 아이가 어떤 상태에 있던 간에 그냥 갈길 가시면 그게 최선이다.
"애기 추워요"라고 얘기하면, 갑자기 애기가 안추워지나? 실제로 애기가 추워서 집에 빨리 가는 중이라고 해보자. 나에게 "애기 추워요" 하면서 말을 붙이면, 그거 상대하고 변명하느라 애기를 추운 상태로 더 방치하게 된다. (이런 코멘트 때문에 무슨 시간 지연이 있냐고 하겠지만...실제 사람들이 나를 잡고 세우거나, 갈 길 가다가 뒤돌아서 다시 와서 "애기 추워요" 라고 말한다. 당해보지 않으면 그 어이없음을 모르지 후후). 애기가 너무 걱정이 되면 빨리 집에 가게 놔두던가. 아니면 돈을 손에 쥐어주며 옷을 사라고 하던가. 아니면 입던 옷을 벗어서 주시던가. 진짜 걱정이 아니다. 오지랖을 떨기 위해 만들어 낸 걱정이지.
즉,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전혀 책임질 이유가 없는 사람이, 오히려 아이를 더 춥게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코멘트를 하는 것은, 단순히 오지랖부리고, 훈수두고 싶은 마음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2.
밖에 나가서 노는걸 너어어어무 좋아하는 알란이를 보통 데리고 나가서 놀아준건 나의 아빠였다 (할아버지). "애기 추워요"가 진심어린 걱정이었다면, 알란이와 항상 밖에 있는, 아기가 혼자 놀게 제일 놔두는, 옷을 가장 대충 입혀서 데리고 나가는 우리 아빠가 제일 많이 들었어야 하는 말이다. 그래서 아빠에게 물어봤다 - "아기 추워요" 라든가 비슷한 맥락의 말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듣는지. 지난 5개월간 하루에 4~5번씩 아이를 데리고 나갔음에도, 단 한번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아기 추워요"의 타겟은 한국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쉽상인 사람들이다. 젊은 20-30대 아기 엄마. 60-70대 할머니. 나와 우리 엄마가 딱 그 타겟이다. "무지한 여자"에게 내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훈수를 두고 싶은거다. 아무도 60대 남자인 우리 아빠에게 훈수를 두지 않는다. 웃긴 건 훈수의 가장 적합한 대상은 이미 육아 마스터가 된 엄마나 할머니가 아니라, 아이 키우는 것이 아직 어색한 우리 아빠라는 점. 하지만 아빠는 남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참 슬픈 점은, 90%의 "아기 추워요"는 다른 여자에게서 온다는 점. :(
3.
3번은 내가 "아기 추워요"가 단순 걱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라기보다, 내가 절대 동의하지 않는 한국인의 강한 하지만 근거가 부족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 무엇이냐면 - 아기는 춥지 않다는 점과, 아무리 추워도 조금 춥게 자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
(한국인의 과학적 근거없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정리할 예정. 한국/한국인에게 듣는 어이없는 점들이 넘나 많다.)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진짜 신생아 시기만 아니면, 아기들은 그렇게 춥지 않다. 특히 한살도 훌쩍 넘은 알란이는 더더욱 그렇다. 보통 어른이 입는 옷과 비슷한 수준으로만 입으면 된다. 그리고 아가들은 몸이 작아서 혈액순환이 빨리 되고 어른보다 살짝 체온이 높은게 보통이다. 그리고 걸어다니는 아가들은 잘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걷고, 달리고, 구르고, 뛴다. 그래서 오히려 어른보다 더우면 더 덥지 그렇게 춥지 않다.
모든 아기들이 항상 춥다고 생각하는 나의 이모는 알란이가 한 여름에, 27도의 실내에서, 목이 조금만 헐렁한 옷을 입으면, 혼자 안절부절이었다. 알란이 춥다며 목에 손수건을 두르려하고, 알란이 옷을 매어 싸서 목 부분을 작게 만들었다. 하지만 알란이는 더워서 땀이 나서 뒷 머리가 다 젖어있는 상태였고, 당연히 손수건을 목에 두르면 1초만에 벗어버렸다. 우리 이모같은 사람이 한국에선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엄마도 이모 정도는 아니지만 나에 비해서 훨씬 아기가 추울까봐 걱정한다. 엄마가 우리집에 알란이 돌보는 거 도와주러 왔을 때, 우리가 알란이 어떻게 키우는지 보면서 매일 매일 알란이 추울까봐 혼자 기절할 것 같았다고 한다...ㅋㅋㅋ
어린이집 선생님도 9월-10월부터 아이들이 윗옷은 두겹입고 온다고 말하면서, "알란이는 춥게 키우시나봐요"라고 얘기했다. 내가 한국에 11월 13일까지 있는 동안, 유난히 따뜻한 가을이었어서, 한 일주일? 정도 빼고는 추운날이 없었다. 그래서 알란이는 거의 맨날 반팔 반바지만 입었다. 어린이집도 따뜻한 실내고, 밖에 나가봤자 놀이터에서 30분 노는게 고작이니 별로 추울 일이 없었다. 한번은 일일 교사 체험을 하면서 실제로 아이들이 추운지 더운지 볼 수 있었는데, 당연히 옷을 두겹씩 입은 아이들이 내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내가 알란이를 춥게 키워도 - 더 정확하게, 한국인 기준으로 춥게 키워도 (실제론 춥지 않으니까) - 알란이 아픈데 하나 없이 건강하다. 어린이집에서 각종 바이러스를 달고 와도, 콧물만 달고 살지, 열이 나거나, 중이염에 걸린다거나 등의 아픈 에피소드는 여태 한번도 없었다.
웃긴 건, 내가 알란이를 꽁꽁 싸매고 키우지 않는다는 걸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원래 아기는 그렇게 건강하고 강하게 키워야하는데'라고 말한다. 그냥 나 듣기 좋으라고 한 빈말이었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수개월동안 "애기 추워요" 어택을 당한 이후로 그게 100% 진심어린 걱정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후, 적당히 무시하기로 했다. 가끔가다 진짜 너무 짜증나서 살짝 들리게 "어쩌라구요..."라고 한 적도 있지만 (알란이가 너무 피곤해해서 급하게 집에가는 중인데, 아기를 안고 빠르게 걸어가는 나를 불러 세워서 뒤돌아보게 한 후 "애기 추워요"를 시전한 사람에게 그랬음), 보통은 그냥 아~네~하고 가버렸다.
그리고 이모와 엄마에게, 길거리에서 아기와 함께 있는 부모/조부모에게 "아기 추워요"라든가, 비슷한 맥락의 오지랖/훈수를 절대 절대 절대 두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걱정이 되도, 아무리 이상해보여도, 당장 아기가 죽을 것 / 심하게 다칠 것 같은 상황 (부모가 다른 곳을 보는데 아기가 찻길로 들어가고 있는 경우 등) 아니면 알아서 육아하게 놔두라고 했다.
육아는 "애기 추워요"를 듣는 것 없이도 이미 충분히 힘들다. 내가 해본 것 중에, 제일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난이도인 것이 육아이다. 한국의 출산율이 걱정된다면, 이미 충분히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 부모 (특히 엄마)에게 "애기 추워요"하며 오지랖 떨고 훈수 두려고 하지 말고, 진심어린 응원을 해주면 좋겠다. 굳이 말하고 싶으면, 아기 옷 사입힐 돈을 쥐어주며 말하던가...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그런 말을 매일 듣는 사람에겐 큰 스트레스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그런 하나하나가 모여 한국인의 매너가 되고, 사회 풍조가 된다. 오지랖 떨기 쉬운 타겟을 찾아서 원하지도 요청하지도 않는 조언을 하는 것이 아마 출산율을 떨어뜨리는 사회 분위기 중 하나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출산율을 높이려면, 지나가는 엄마에게 "아기 추워요"하고 오지랖 떠는걸 금지해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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